제목: '부활의 집'에 찾아온 기적

12시 20분 경, 점심상을 물리고 나니 최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신다.

"목사님, 잠시 시간 좀 내실 수 있습니까?"
"예, 그럼요."
"아이, 다름이 아니라 목사님 앞에서 성곤이가 오늘 한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 같아서요…"
"성곤아-"
"예"
"저 방에 가서 가방 가져오너라."
"예"

최 선생님은 우리 '부활의 집'의 전 주인이시고 올해 84세의 정정한 노신사이시다. 6.25 전쟁 때 만주에서 내려오셔서 당시 이곳이 구포의 깊은 골짜기였는데 자리를 잡으시고 53년을 지켜오신 분이시다. 움막을 짓고 우물을 파고 밭을 일구며 사시면서 8남매를 키워 모두 내 보내시고, 몇 년 전엔 부인 할머니를 사별한 후 줄 곧 이 집에 혼자 사셨다. 아담한 기와집에 정원 가득한 나무들은 53년의 세월동안 정성껏 가다듬어온 또 다른 정든 자녀들이었다. 최 선생님은 빚을 정리하고자 우리에게 집을 파실 때 너무도 기뻐하셨다. 40여 년 간 한결같이 신앙을 지켜온 원불교의 독실한 신자이신 대도, 우리 가족 한 분 한 분 손을 잡으시고 반겨주셨다.

사실 작년 3월 말 이사한 이 후 몇 개월 간은 앞집 두 세 집에서 유난스레 반대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냄새가 난다느니', '불안하다느니' 하면서 집 마당까지 쳐들어와 고함을 지르며 구청에도 민원 고발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모든 성화를 잠재운 것도 최 선생님의 인품과 오랜 인심 때문이었다. 최 선생님은 53년의 손때 묻은 집을 뒤로하고 이웃 집 단칸방으로 옮겼으나, 우리 집 명예 가족으로서 3시 세끼 한 밥상에서 만나기를 벌써 1년을 지내 오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 가을 언젠가부터 내게 성곤이를 한번 가르쳐 보시겠다고 말씀해 오셨고, 추운 겨울을 지나 올 봄에 이르기까지 성실하게 줄곧 숫자와 한글을 가르쳐 왔었다.

이윽고 성곤이가 가방을 들고 내방으로 들어왔다. 낡은 비닐 서류가방 안엔 공책 필기구 등이 있었고 가는 대나무 회초리도 하나 나왔다. 최 선생님의 말씀에 성곤이는 깍듯하게 작은 밥상을 가져와 폈고 그 위에 공책을 올렸다. 이윽고 최 선생님의 위엄스런 호령이 떨어졌다.

"공책을 펴고, 볼팬을 꺼내거라."
"곤채, 곤책… ＃＆♪＊＠ 피시오?"
"그래, 됐다."
"목사님, 제가 우리 주소를 말하면 우리 성곤이가 받아 쓸겝니다."
"받아 쓴다고요, 최 선생님?"
"제가, 지난 두어 달 동안 관절염이 도져서 성곤이 공부를 쉬었다가, 어제 다시 시작을 했는데 글쎄 제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지 않겠습니까? 제가 놀랬습니다."

성곤이가 볼팬을 꼭 쥐고 상 앞에서 최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표정이, 마치 조련된 강아지가 주인의 지시를 기다리며 눈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름-, 여기부터 쓰거라."
"이-리-?, ＆＾＾％＃ㆀ 시시여?"
"그래, 다음은 부-산-시-, 어서 써라!"

성곤이는 지렁이가 기는 모습이지만, 정확하게 써 내려갔다. 코 망울에 땀 이슬이 맺히면서 용을 쓰고 적고 있었다. '이름 김성곤, 주소 부산시 북구 구포2동 776-1번지 31통 1반 부활의 집' 정말 놀라웠다. 한 자도 틀림없이 써 내려가지 않는가! '통'자는 물론 '활'자까지 막힘 없이 꼬불꼬불하지만 완벽하였다. 나는 감탄하면서 성곤이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칭찬하고 또 칭찬하였다. 성곤이는 주름진 얼굴이지만 아이 같은 티 없는 웃음으로 환하게 웃어주었다.

우리 '부활의 집'은 남자들만의 생활 공동체인데 요즈음은 15∼16명의 식구가 살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알코올 중독자부터 목수, 컴퓨터 기술자, 한글을 전혀 모르는 주방장까지 다양하다. 요즘 황 형제라는 분은 부산지방법원에 성과 본 창설을 판결 받고 다시 법원에 취적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이분까지 호적 없는 사람을 네 번째 만난 셈이다. 정신지체 3급으로 최 형제와 감 형제가 있는데, 감 형제는 작년 정신질환까지 겹쳐 지금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런데 성곤이는 정신지체 1급으로서 실제 나이가 42세이지만 행동 나이는 3∼4세로 보이는 '어른애'이다.

오늘의 놀라운 '성공'이 있기까지 최 선생님의 지성과 공덕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지난 겨울 어느 날이었는지 기억이 난다. 매일 아침 식사 후 두시간 정도 일대 일 수업을 하는 소리가 집 밖으로 새어나온다.

(최 선생님) "일, 하나"
(성곤이) "이-, 하나"
(최 선생님) "이-가 아니고 일, 일이다. '일 하나' 해봐라."
(성곤이) "이-, 하나"
(최 선생님) "이, 둘"
(성곤이) "이-, 두이"
(최 선생님) "삼, 셋"
(성곤이) "삼, 세에-"
(최 선생님) "그래, 됐다. 이거 뭐꼬?"
(성곤이) "이거 무꼬?"
(최 선생님) "일, 하나 아이가! 응. '이거 뭐꼬' 하고 따라하면 되나! 정신 못 차리나, '딱'"
(성곤이) "아야야-, 호-"

내 방에서 들으면서 배꼽을 잡으며 웃음을 참으면서도, 저 거룩한 교육 현장을 어느 누가 알아주랴 싶어 마음 한쪽 못내 아쉬웠다. 아이처럼 뛰어다니는 성곤이는 불평도 원망도 없고 오직 웃음과 순종뿐인 살아있는 천사다. 식후엔 양치를 하고 입을 찢어지게 손가락으로 벌리며 한번도 빠짐없이 내게 찾아와 확인 시켜준다. 그리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최 선생님과 내 신발은 얼른 나서서 바로 정돈해 준다.

어느 날 이었다. 우리 집 주방장 김 형제가 정신지체 3급 최 형제를 부르더니 뭐라고 나무라는 소리가 들린다. 문맹 주방장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정신지체에게는 만만하기에 그런가 보다.

"ㅎㅂ아-, 아 ㅎㅂ아-"
"…"

ㅎㅂ 형제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항상 그렇듯 끄먹끄먹 댄다.

"야이 새끼야, 안들려?"

그런데 조금 뒤,

"야마, 그것도 몰러?, 이게 머여? 먼자여?"
"에라이, 멍청아. 이것도 몰러? 사여 사"
"아야-아, 아"(꿀밤을 주었는지)

정신지체 3급인 ㅎㅂ 형제가 1급인 성곤이에게 의기 양양히 배운 것을 아는지 물어보고 의시댄다. 그러면서 최 선생님의 가르침이 소용없다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나름대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3급도 기를 펼 수 있는 우리 집, 그런데 1급은 어쩌란 말인가? 아, 놀랍다. 1급 성곤이는 바다가 되어버린다. 위에서 먹이사슬처럼 모두 눌러도 모두 흡수해 버리는 놀라운 '바보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었다. 스트레스도 없고 짜증도 없다. 분노도 불만도 욕심도 없다.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린다.

'아! 바보의 은혜여-'

2004. 6. 10 (깊어 가는 밤 부활의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