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뷰’(지금 일어나는 일을 전에 체험한 것 같은 현상)인가.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면서 1994년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북한은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긴장을 고조시켰다. 미국은 영변 핵시설 폭격을 검토하기에 이른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94년 7월 남북은 김영삼 대통령·김일성 주석 간 회담에 합의한다. 이 회담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성사되진 못했다. 박관용(72) 전 국회의장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그 현장에 있었다. 남북 국회회담 대표(12대 국회), 국회 통일특위 위원장(13대 국회), 두 차례의 국회 외무통일위원장 등 원로정치인으론 드물게 통일외교 전문가로 꼽히는 박 전 의장을 4일 개인사무실에서 만났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환기 상황에 대해 박 전 의장은 “세월이 가면 세상도 바뀌는 만큼 안경을 자꾸 바꿔 끼어야 한다. 너무 하나만 고집하면 안 된다. 이 정부가 대외정책에서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천안함 침몰 사건, 연평도 포격 등 지난해 남북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보나.

　“북한의 주장은 한마디로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의 정책으로 회귀하라는 거다. 이명박 정부 들어 강경 모드를 고수하니 ‘전쟁과 평화 중 선택하라’는 거다. 도발은 일석사조, 일석오조도 노리고 있다. 도발만 하면 남남갈등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김영삼(YS)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당시 안기부(국가정보원의 전신)에 ‘통일 등 급변사태 대비 매뉴얼을 만들라’고 지시했다는데.

　“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한 뒤 ‘이런 비상시에 정부가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건을 가져오게 해서 읽어봤다.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다. 근데 하나도 쓸모없었다. 그래서 다시 만들라고 지시했다.”

　-현 정부에 진전된 매뉴얼이 있는가.

　“지난 정부 10년 동안에는 손을 안 댔고, 이명박 정부 들어 손질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북한 도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현재의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해야 하나.

　“북한이 ‘3대 세습을 한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개혁·개방은 할 수 없고 선군정치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핵·개방·3000’은 현실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다. 정부가 실정에 맞는 새로운 대북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현 정부에서도 남북 정상회담이 필요한가.

　“물론이다. 교전 당사자도 회담은 하는 것 아닌가. 다만 관례에 맞게 해야 한다. 회담 자체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퍼주기 약속을 해선 안 된다.”

　-94년 7월 ‘김영삼·김일성’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계기가 있었나.

　“계기보다 교훈으로 삼을 일이 있다. 94년 6월 미 백악관에서 북한의 영변 핵시설 관련 ‘북한을 공격하자’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는데 그런 중요한 정보를 한국 정부가 모르고 있었다. 미국은 동해안에 항공모함을 진주시키고 영변 공격을 준비했다.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가 군인 가족과 미국인 가족 소개령에 대해 기자회견을 한다는 정보를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이 듣고 와서 대통령에게 보고해 알게 됐다. 뒤늦게 김영삼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 내가 80만 대군의 국군 통수권자다. 전쟁에 단 한 명의 국군도 동원하지 않겠다’고 하니 클린턴 대통령이 한발 물러섰다. 이러던 중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미국의 이런 분위기를 전하니 김일성이 굴복한 거다. 영변 핵을 정말 공격하는구나 해서 ‘IAEA 사찰 받고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한 거다.”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 의지를 보인다. 미 행정부 내에서도 북한 핵 문제 해결에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미국으로선 6자회담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다른 방안을 못 찾으니 6자회담이 유효한 것이다. 이것을 눈치챈 북한이 도발하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미·중, 남북한 모두가 전환기에 서 있는 것 같다. 미국은 ‘북한과 대화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약속해 놓고 뒤집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북한 3대 세습 과정에서 붕괴 가능성이 있으니 그걸 막으려고 적극적으로 북한 편을 든다. 개혁과 개방으로 끌어내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식량을 지원해 주자’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중국이 부상하는 만큼 미국에 한국이 전략적으로 더 중요해진 것 아닌가.

　“연평도·천안함 사건은 한반도가 동북아 안보의 구도로 자리 잡았다는 걸 보여준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회주의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국가, 과거 냉전 형태로 복귀하고 있는 거다. 헨리 키신저(미국 전 국무장관)가 ‘인간의 DNA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중국도 결국 힘이 생기면 패권국으로 변할 거다.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하되, 우리가 통일돼야 중국에 더 유리할 수 있다고 중국을 적극 설득해야 한다.”

　-북한의 3대 세습이 성공할까.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동양 사람들 사고가 있다. 어떻게 나이 스물 몇 살 먹은 애에게 권력을 맡길 수 있느냐는 분위기에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북한에 외부 정보가 유입돼 불만이 커질 거다. 김정일이 버티고 있는 김정은과 김정일 없는 김정은은 다르다.”

　-정부 내에서 통일에 대비해 통일세 등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이 있다.

　“(93~94년)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경제기획원 장관을 불렀다. ‘언제 올지 모르는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 돈을 준비해야 하지 않나’ 했더니 ‘ 천문학적 돈이 필요한데 조폐공사에서 돈을 찍어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세금을 걷으면 국민이 반발할테니 기금 형식이 더 낫다.”

　-현 정부 대북정책이 전환기에 와 있는 것 같다.

　“대북 억지력을 확고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북한은 미국의 무력 공격이 박두했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않거나, 북한의 사활이 걸린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하지 않는 한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계획과 비전 때문에 통일된 경우는 없다. 실질적인 것을 준비해야 한다. 긴장을 해소하고 국론을 통일하는 게 중요하다.”

글=박승희·백일현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