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마다 한 번씩,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경남 김해시 진례면을 찾는다. 그곳에 나의 정신적인 스승인 안종수 감독님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60세라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그가 세상을 하직한 뒤의 상실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래고 시절 축구에 눈을 뜨게 해 주었고, 나를 진정한 국가대표팀 선수가 되게 해 주었던 분이니 어찌 잊겠는가.

제일모직으로 나를 인도한 것도 그였다. 음식을 빨리 먹지 못하는 나는 항상 밥먹는 데 곤란을 겪곤 했다. 선후배들이 후닥닥 먹고 나면 먹을 반찬이 부족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나를 가까이 불러 같이 먹자고 배려해 주셨다. 깊은 정을 베풀어 주셨으나 그 1푼만큼도 되갚지 못해 늘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내게 영혼을 심어준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내가 제자들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어려웠던 시절, 그는 내게 든든한 마음의 기둥을 세워 주었다. 안 감독님은 성격이 엄했지만 그 밑바탕엔 항상 사랑이 고여 있었다. 선수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말없이 베풂을 실천하신 그런 분이었다. 어려움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묵묵하게 극복해 내는 강인함과 깊은 품성을 그는 갖고 있었다.

안 감독님 같은 지도자는 여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제자들을 자식 같이 마음 속으로 생각해 주는 분은 보기가 힘들었다. 사춘기 때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를 그를 통해 알게 됐다. 또한 지도자의 희생이 왜 필요한지, 선수들이 미래에 큰 일을 할 수 있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역할도 그를 통해 배웠다.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몇 분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아시아 황금의 다리'로 명성을 날린 최정민 감독이 양지팀의 초대감독을 맡았다. 이북 출신인 그는 평소 말씀이 별로 없었지만 굉장히 강한 분이었다. 그는 항상 강한 의지를 갖고 축구를 해야 된다고 요구했다. 승부욕도 엄청 나 팀이 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양지팀은 대부분의 대회에서 우승했다. 2년 가까이 그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강한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똑똑히 배웠다.

박일갑 코치도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이북 출신으로 방첩대에서 축구를 했던 박 코치는 이력과는 달리 선수들에게 인간적인 가르침으로 감화를 주었다. 1967년 11월 초 제대를 앞두고 월남 건국기념일 시합을 나갈 때였다. 백마부대에 근무하고 있던 형이 전사를 하게 된다. 박 코치는 차마 이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사이공에서 시신이 있는 나트랑까지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형의 시신을 확인하고 주월사령관인 최명신 장군으로부터 충무 무공훈장을 형 대신 받아들고 돌아와야 했다.

양지팀에서 김용식 감독을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김호-김정남 시대를 연 것은 순전히 그의 덕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공격수로 윙어였던 그는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는 등 만능맨이었다. 일제시대 유일한 한국인 국가대표였으며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성격이 강직하고 의지가 강한 분으로 1세대 한국축구의 대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외국어에 능숙한 때문인지 해외에서 축구공부도 많이 해 전술변화에 관심이 많았다. 나와 김정남 씨를 센터하프 자리에 놓아 포백을 구사했는데 하나는 스토퍼, 하나는 스위퍼 역할을 맡겼다. 자유롭게 수비와 공격을 오가는 리베로라는 개념도 그가 도입했다. 말하자면 나와 김정남 씨가 번갈아가며 리베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 축구가 아시아 수준에서 높이 갈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그를 깊이 알지는 못했지만 무언 중에도 나를 아껴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변화된 전술은 1970년대 국가대표팀 청룡이 아시아를 석권하게 되는 기초를 닦았고 그 꽃을 만개시킨 것은 한홍기 감독이었다.

해병대에서 제대한 이후 제일모직으로 복귀했을 때 대표팀 감독이 한 감독이었다. 그때부터 2년 반 가량, 또 그 뒤 포항제철에서 5년, 도합해 8년여를 스승과 제자로 한솥밥을 먹었다. 이북 피란민 출신인 그는 산과 물을 좋아하고 다른 축구지도자와는 전혀 딴판으로 성격이 부드러웠다. 늘 인텔리의 풍모를 잃지 않는 그는 축구계의 신사로 통했다.

사실 내가 한일은행 감독으로 갈 때도 한 감독님이 길을 열어 주셨다. 운동장에서 서로 상대팀의 감독으로 만난 스승과 제자, 참으로 당혹스러웠지만 승부의 세계는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시 한 감독님은 포항제철 감독으로 계셨는데 우승 일보 직전에 우리 팀에 3-1로 지는 바람에 우승을 놓치기도 했다. 나 역시 지금 제자나 후배들과 승부를 다투고 있다. 한일은행, 현대팀의 제자였던 최강희, 감독과 코치로 만난 10년 이상 후배인 허정무 조광래 박항서 등 4명은 지금 프로축구팀 감독이 되어 나와 운동장에서 승부를 겨룬다. 승부의 세계는 그런 것이다.

축구계라고 해서 늘 좋은 인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만나면 뒤틀리는 그런 관계도 있었다. 내가 군대를 간 사이 제일모직에서 방출됐던 문정식 코치가 다시 팀에 복귀하고 우여곡절 끝에 안 감독님이 팀을 떠나게 됐다. 나 역시 팀을 떠났음은 물론이다. 안 감독님은 50대의 나이였으나 이 일로 축구에 환멸을 느끼고 아예 축구계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병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축구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불과 나이 서른 살에 대표팀을 떠난 것도 그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그는 고대 연대 출신만 찾고 지방출신들에게는 심한 서러움을 주었다. 편견이 심한 데다 듣기 거북할 정도의 말도 서슴지 않았다. 대표팀을 떠나려 하자 장덕진 축구협회장이 4시간 동안 나를 설득했다. 나는 "지도자는 많지 않지만 선수는 많이 있다. 내가 떠나는 게 낫다"며 오히려 장 회장을 설득했다. 나는 문 코치에게 선배는 떠나더라도 한참 떠오르는 박이천 정기풍 등 젊은 선수들은 남아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최절정기의 청룡팀을 해체하고 유망한 젊은 선수들을 물갈이함으로써 엄청난 피해를 양산해냈다.